"나는 감동을 주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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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오늘 말씀에 한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의 배경이자 인물은 유대사회와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셨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이스라엘에 주둔하며 백성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목할 것은 이 이방인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감동하셨다.’ 이것은 굉장히 드문 사건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감탄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얼마나 감동하셨냐면,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아주 칭찬하셨습니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최고의 칭찬 아닙니까? 과연 백부장은 어떤 인물이고,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수많은 기적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라요. 한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 군인으로 높은 신분과 권력과 재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간구한 것이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가족이나 자녀의 문제도 아닙니다. 자신의 밑에 두고 있는 종의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종입니다. 노예에요. 당시의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었습니다. 죽어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예를 치유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타적이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에 예수님도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과 삶의 자세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 진정성 있는 사랑을 나눌 때 감동합니다.
1. 진정성 있는 사랑을 나눌 때 감동합니다.
여러분, 오늘 백부장이 살리려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2,3절의 말씀입니다.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사랑하는’ 정확히 번역하면 ‘귀하게 여기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이지만 자신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종이었습니다. 자신이 병들어서도 아니고, 자신의 가족이 병들어서가 아니라 종을 위해서 예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시대 배경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당시의 주인은 노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으며, 시장에 내다 팔수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나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는 도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저술가였던 ‘바로(Varro)’라는 사람은 “농업에 사용하는 세 가지 도구가 있는데 첫째, 언어를 가진 도구요 둘째, 언어가 없는 도구요 셋째, 소리가 없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언어를 가진 도구는 노예를 말하고, 언어가 없는 도구는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을 말하며, 소리가 없는 도구는 수레나 호미나 괭이와 같은 연장을 말합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에요. 도구나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가성비로 따지면, 쓰다가 망가지면 고치는 것 보다 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도움이 안 되는 아픈 종은 버리고 새로운 종을 데리고 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종은 그저 자신의 도구와도 같이 여기던 시대에, 자신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백부장은 로마의 장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종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이 정복하고 있는 유대민족의 젊은 청년이던 예수님에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더 높은 백부장이 더 낮은 신분의 노예를 살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고를 마다 않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로마군의 장교가 자신이 피정복자인 유대인의 젊은이에게 권위를 내려놓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내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종을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최근 군 장교와 하사관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 뉴스가 보도 되었습니다.
“나이 어린 장교가 아버지뻘 되는 부사관에 반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는 찬반이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되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가 부족한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약소국의 서러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어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무시 합니까? 가난한 나라의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떨 때 감동해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을 때 아닙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존중할 때 감동하지 않습니까?
예화) 한 의사가 아프리카 한 마을에서 의료 봉사로 섬기며 지냈습니다.
그 마을에는 추장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매우 훌륭한 엘리트였습니다.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추장 아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온 마을 술렁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과연 그가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 의사 역시 궁금한 마음을 가지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남자가 청혼할 때 여자의 집에 암소를 끌고 가서 하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처녀는 암소 한 마리를 받았고 때때로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가끔씩 암소 세 마리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 그 마을 처녀 중에서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추장 아들이 청혼하기 위한 차비를 차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 행렬을 보니 암소를 무려 아홉 마리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역시 추장 아들은 달라, 누가 저 암소 아홉 마리를 받고 추장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될까?’라고 웅성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추장 아들이 도착한 집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몹시 가난한 집에다가 청혼을 받은 처녀 역시 병약한 외모에 영 볼품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들 실망하였습니다. ‘추장 아들이 정신이 나갔나보다, 저런 아가씨에게 암소를 아홉이나 갖다 바치다니!’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 의사는 본국으로 귀환할 때가 되어서 그곳을 떠났고, 그 후로 그 추장과 그 처녀의 이야기도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마을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추장 아들이 어느덧 추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추장의 초대로 그 집에 방문한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추장의 부인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예전에 봤던 그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자신감 없고 초라한 아가씨가 아닌 무척 당당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영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야말로 멋진 여성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추장이 하는 말이 ‘사실 그때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청혼의 순간에 암소를 몇 마리나 받았느냐가 한 여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평생 자신의 가치를 암소 한두 마리 값에 한정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 아내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를 보고 무척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의 암소에 걸맞게 하기 위해 정말이지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가꾸라는 등의 조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고만 말했죠, 그런데도 아내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멋진 여성이 되어갔습니다.’
여러분,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뭐 길래 나를 위해 소를 아홉 마리나 값을 치루나. 그러면서 그의 인생의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가꾸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감동합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고귀한 헌신을 보여줄 때 감동하지 않습니까? 백부장이 하인을 위해 엎드립니다. 얼마나 존귀합니까? 나는 종인데, 그저 한낮 노예에 불과한데 그런 날 위해 백부장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기는 하지만 이 종은 이렇게 자신을 위해 엎드릴 줄 아는 주인이 있어서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이구나, 내가 이렇게 가치 있는 존재였구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종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랑은 진짜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감동하신 이유도 이거예요. 백부장이 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모진 수치를 다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 존귀한 존재임을 아니?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그만큼 널 사랑한다. 내가 모진 수치를 당할 만큼 널 가치 있고 고귀한 존재로 창조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까?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라는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고 행복한 인생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목숨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인생입니까?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고 존귀하게 살아가시는 예배자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음을 다하여 종을 사랑한 백부장의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아픈 종을 위해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장로들이 대신 예수님께 찾아가서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보통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방인 백부장은 유대인들과 한 마음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나와 간청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장로들입니다. 장로들은 지도자들이고, 더욱이 율법을 소중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4,5절입니다.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백부장을 도와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런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있다 라고 예수님께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시 역사 기록에 의하면 유대를 통치했던 로마 관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을 압박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인격과 삶은 매우 특이한 것이고, 이를 위해 대신 간청하는 유대인 장로들의 행동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왜 장로들은 자신의 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을까요? 그것도 형식이 아니라 ‘간절히’ 청했고, 그것이 이 로마인 군인에게 ‘합당하다’라고 말했을까?
왜 그런가요? 백부장은 자신의 정복 민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와서 간절히 간청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주는 사랑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려고 하십니다. 6-7절입니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오늘 6,7절에서 우리가 두 가지의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신다면 자신의 종이 낫겠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자신은 완전한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은 배려하는 겸손입니다. 오늘은 이 백부장의 겸손, 배려의 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집에 방문하려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니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그 방문을 사양합니다. 부정한 이방인인 자신의 집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고, 자신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감격스러운 방문을 왜 이렇게 거절하는 것일까요? 백부장이 예수님께 내 집에 오시지 말고 말씀으로만 하시라고 한 대답에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배려가 숨겨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전된 율법을 수집해서 체계적으로 편집한 책을 미쉬나(הנשׁמ)라고 합니다. 미쉬나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부정하고 불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에 집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물로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은 사회적 비판과 종교적 심판, 이 두 가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 백부장은 이러한 관습을 잘 알았어요. 그래서 유대 민족의 문화를 존중한 백부장은 이방으로서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대신 보내 종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새번역성경을 보면 이러한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자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편견과 적개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혹시 폐가 될까봐 예수님의 방문을 사양한 것입니다. 백부장이 얼마나 겸손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너무 좋지만, 상대방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이 유일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과연 그 일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치유를 요구할 자격조차 없는 이방인이자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원하시고 말씀만 하신다면 치유될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로마군인이자 이방인인 백부장은 유대인의 문화를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절히 요청했지만, 유대문화를 배려하여 접근했습니다.
여러분, 배려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백부장의 믿음과 겸손은 오늘 우리를 자성케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풀러신학교 총장이었던, 리처드 마우는 오늘 다원주의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할 첫 번째 덕목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마음으로 동료 시민들을 존중하며 사회 전체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자세”(리처드 마우)
한 신학자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시민 모임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기보다 교양품격을 갖는 태도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은 소통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무례한 기독교가 아니라,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이방인 백부장과 같은 자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번역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라고 표현합니다.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호감이 단순히 모여서 열심히 찬양하고, 예배드렸다고 생겼을까요?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서, 교회에서 봉사 열심히 했다고 생겼을까요? 물론 그것도 열심히 했겠지만, 핵심은 예수님 믿고 그들의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에게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더니 호감을 얻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숙한 삶과 인격의 열매를 통해 세상에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새송교회 성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그의 인격과 삶을 보면 알 수 있어. 이런 평가로 호감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옵니다. 아니면 자신의 가족, 자녀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당시에 사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여기던 하인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과 권위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백부장은 그의 종에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늘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은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의 사랑과 겸손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배우고 실천해야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5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격 없고 조건 없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마땅히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그 마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내어 주면서까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배려하는 제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이 땅의 교회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